한국어 이론 용어 해설 – 한국역사의이해

한국어 교육자를 위한 용어 해설집

고조선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국가로, 처음 역사서에 등장할 때는 ‘조선’이라고 하였다. 고조선이란 명칭이 널리 쓰인 것은 20세기 들어와서였다. 이씨조선과 구분되는 고대의 조선이란 의미이다.

백제

백제는 삼국의 하나로,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했으며 660년에 멸망한 고대국가이다. BC 18년에 부여족 계통인 온조 집단에 의해 현재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건국되었다. 건국 후 고구려, 신라와 동맹과 공방을 되풀이하면서 영역을 영산강, 섬진강 유역까지 확장하여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지정학적인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 중국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백제화하고, 다시 지금의 일본이나 가야에 전수해 고대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은 당에 의해 멸망했다.

고구려

고구려는 BC 1세기부터 668년까지 존속한 고대 왕국이다.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초기 성읍국가로 출발하여 주변의 여러 종족들을 융합하여 강대한 국가로 발전했다. 중국 한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의 군현이 설치되는 등 위축된 시기도 있었으나 이들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국력이 더욱 강해졌고 중국의 통일 왕조인 수와 당의 침략도 물리치며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후기에 성립한 귀족 연립 정권의 내부 분열로 국력이 약화되어,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신라

신라는 BC 57년부터 935년까지 992년간 존속했던 고대 왕조이다. 경주에 자리하던 여섯 씨족이 연합한 성읍국가로 건국했다. 가야를 합병하고 중국과의 교통로인 한강 유역을 점령하여 강성해졌다. 7세기 중엽에 당을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발해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열었다. 하대에 들어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반복되고 호족 세력이 대두하면서 왕권이 약해져 중앙집권적 국가로서 존립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후삼국으로 나뉘었다가 경순왕이 고려의 왕건에게 스스로 항복함으로써 신라왕조는 멸망했다.

발해

발해는 698~926년, 한반도 북부에서 중국 동북 지역와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걸쳐 존속하며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을 이루었던 고대국가이다. 925년 12월에 거란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고 926년 초에 멸망하였다.

후삼국 시대

후삼국시대는 통일신라가 분열되어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를 이은 고려 등 3국이 정립하였던 900~936년 시기이다. 신라 말 호족의 대두와 농민 봉기로 인한 혼란 속에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했다. 918년 궁예를 몰아낸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다. 935년 견훤이 고려에 망명하였고, 신라의 경순왕도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936년 왕건은 후백제를 정벌함으로써 통일을 이루었다. 후삼국 통일은 한국 민족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고려

고려는 918년 개성 출신 왕건이 건국하여 936년 후삼국을 통합한 뒤 1392년 멸망 때까지 34명의 왕씨 출신 국왕이 474년 동안 통치한 왕조이다. 고려 초에 광종의 과거제 시행, 성종의 체제 정비를 거쳐 문종 때 전성기에 도달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무신정변, 하층민의 봉기, 몽골에 대한 항쟁 등으로 기존 질서가 크게 변동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원나라의 간섭, 여러 내부적인 진통을 겪은 끝에 조선이 건국되었다.

위화도 회군

위화도 회군은 1388년(고려 우왕 14)에 명나라 요동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던 이성계 등이 위화도에서 회군해 우왕을 폐위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우왕 재위 기간 내내 고려와 명나라는 갈등을 겪었는데, 1388년 명나라에서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자 고려는 요동 정벌을 결정하고 5만여 명의 군사를 동원하였다. 군대를 이끌었던 이성계는 정벌 자체에 반대하였고, 출진 이후에도 정벌을 중단하자고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단독으로 회군해 개경을 공격하여 우왕과 최영 장군을 축출하였다.

조선

조선은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간 한반도에 존재한 왕조 국가이다. 국왕의 밑에서 양반 관료들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어 정치를 행하였다. 농업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자연 경제체계가 강하였고, 양반 중심 세습 신분제 사회였으나,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속에 신분제는 점점 느슨해졌다. 유교 문화가 계속 강해지는 가운데 서민과 여성들은 고유성을 강인하게 지켜 나갔다.

유교

유교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에 공자가 체계화한 사상을 계승한 종교이다. 공자는 인과 덕에 의해 천명에 따르는 이상세계를 인간의 힘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사상은 유교 경전인 사서삼경에 녹아 있다. 공자의 사상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나라에 전파되었지만 주로 국가운영원리로서의 유학이었다. 종교적 체계를 갖추는 것은 고려말 조선 초에 이르러서였다. 문묘를 세우고 공자와 성현의 위패를 모셔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고 민간에서도 유교 사상에 따른 제사 풍습 등이 체계적으로 자리 잡았다.

족보

족보는 친인척 관계를 계통적으로 증빙하는 명부이다. 족보는 동아시아 고대 왕조 국가가 지배층에 대한 집권적 통치의 필요성에 따라 작성토록 한 것에서 유래한다. 조선 전기의 족보는 편찬에 참여한 여러 성씨의 가족들이 선조들의 혼인 관계에 근거하여 신분적 결합을 꾀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조선 후기 족보는 부계 남성 중심의 계보로 전환되었다.

양반

양반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지배 신분층이다. 국왕이 조회를 받을 때, 동쪽에 서는 문반과 서쪽에 서는 무반 두 반열을 통칭하여 양반이라 하였다. 고려 초반까지만 해도 양반은 문자 그대로 문반과 무반 관료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양반 관료 체제가 점차 정비되면서 가부장적인 가족 구성과 공동체적인 친족관계로 인하여 양반 관료의 가족과 친족도 양반으로 불리게 되었다. 양반층은 과거를 통한 관직의 세대 이전, 그들 간의 폐쇄적 혼인 등으로 점차 폐쇄적 계층으로 굳어졌고, 양반이라는 말 자체도 지배 신분층을 뜻하는 개념으로 바뀌어 갔다.

노비

노비는 전근대 신분제 사회에서 최하층 신분을 말한다. ‘노’는 남자종, ‘비’는 여자 종을 말한다. 전쟁, 형벌, 부채 등으로 충원되었으며 대대로 세습되었다. 국가 소유의 공노비와 개인 소유의 사노비로 구분되며, 노동력 제공이나 신공 납부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후에 노비 세습제 폐지, 신분제 혁파를 차례로 거치면서 노비제도는 소멸하였다.

동학농민운동

조선 고종 31년(1894)에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반외세 운동을 말한다. 이는 1894년 3월 봉건체제개혁을 위해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2차로 봉기한 항일 무장 투쟁을 가리킨다. 농민들이 일어나 부정과 외세에 항거하였다고 해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내부적으로는 갑오개혁 , 외부적으로는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1919년 3·1운동 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의병

의병은 조선 이후부터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다른 민족의 침략에 저항한 자발적인 백성의 군대이다. 다른 민족의 침략에 대응하여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말의 1, 2차 의병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장군이 북한의 남침 이후 인천지역에 대한 작전을 통해 북한군의 병참선과 배후를 공격하여 전쟁을 반전시킨 상륙작전이다. 맥아더 장군은 서울 함락 직후부터 인천상륙작전을 비밀리에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9월 15일 2시에 미 제7함대 세력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 261척의 함정과 총병력 7만여 명으로 구성된 지상군 부대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 작전은 북한군의 병참선을 일거에 차단하여 낙동강 방어선에서 반격의 계기를 조성했고, 이어진 수도 서울 탈환은 국군과 유엔군의 사기를 드높이고 북한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4.19 시민혁명

4·19혁명은 1960년 4월, 학생이 중심세력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이다. 1950년대 말에 반공 이념과 경찰력이란 물리력에 의존하던 이승만식 독재가 한계를 드러내면서 도시지역과 지식인, 학생 등 식자층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높아져 갔다. 부정선거를 통하지 않고는 정권연장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러 3·15부정선거를 공공연히 자행하자 학생들을 선두로 한 민심은 폭발했고,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발포도 이를 막지 못했다. 이승만의 하야와 망명으로 독재는 종식됐으나 지도부 부재 등 준비되지 않은 혁명은 완성되지 못한 채 군사 쿠데타의 길을 터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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